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단 편집) == 창립 ==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황제]]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 제국]]에게 양도한 행위는 무효이며, 포기한 주권은 [[대한국민]]에게로 승계됐다는 정신이 확립됐다([[대동단결선언]]). 이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자,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김규식]])를 파견했고, 일본에는 [[장덕수]]를 파견하여 [[2.8 독립 선언]]을 하도록 했다. 이러한 일련의 소식들이 식민지 조선에 전해지자 독립에 대한 희망이 생겼고, [[태상황]]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사망으로 군중이 운집한 상황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 3.1 운동의 결과 [[상하이]]에서 항일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들이 모여 [[1919년]] [[4월 10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창설했다. 여기에서 국호와 정부 형태, 임시헌법 등을 논의하게 되었는데, [[신석우]]가 '''"[[대한제국|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민국|대한]]으로 흥하자"'''라고 제안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이때 [[여운형]]은 "대한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엽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다. 후에 그의 조직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내세운 국호도 [[조선인민공화국]]이었다. 다음 날인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은 [[헌정사#s-3.1|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하여 상하이 임시정부를 결성했다.''' 이전에는 임시정부 수립일이 4월 13일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임시정부에서 [[http://news.donga.com/3/all/20180328/89333890/1|4월 11일에 정부 수립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자료가 공개]]됐고,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기념일 일자 변경을 요구해 왔다. 그래서 2018년 4월 13일에 대한민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1일]]'''로 바꿨다. 그리고 2019년부터는 4월 11일을 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하기로 했다. 30년 만에 임시정부의 생일을 바로 잡은 것이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기치를 내걸고 '''[[경성부]]에서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한 [[한성정부]]가 대조선공화국을 국호로 하여 13도 대표 국민대회의 명의로 선포됐고(1919년 4월 23일)[* 1919년 5월 31일 [[신흥우]]에게서 한성정부 수립의 문건을 건네받은 이승만은 6월 14일부터 '''대한공화국 대통령(Repulic of Korea President)'''이라 자칭하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 칭호 문제는 이승만과 다른 운동가들 사이의 많은 갈등을 낳았는데 이는 이승만이 여러 임시정부들에서는 있지도 않았던 대통령이라는 칭호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됐다(1919년 3월 17일).''' 상기 단체 외에도 1919년에는 고려 임시정부, 신한민국 임시정부, 조선민국 임시정부 등 여러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칭하는 세력들이 분산되어 있을수록 항일투쟁이 힘들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서로 통합을 계획하게 된다. 참고로 이승만은 고려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신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조선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로 추대되어 있었다. 이에 대한국민의회 - 상하이 임시정부가 먼저 통합을 하기로 했지만 중국과 러시아라는 위치 문제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대한국민의회의 대다수를 임시의정원에 포함시킨다는 조건으로 결국 통합되었다. 한반도에 있는 한성정부와의 통합 역시 난관이 많았지만 한성정부가 국제언론에 노출되었다는 것, 국내에서 13도 대표 국민대회를 통해서 결성되었다는 점에서 정통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래서 정통성과 기틀에서는 한성정부를 따르는 대신에 위치와 국호에서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따르는 것으로 합의안을 완성했고, '''[[1919년]] [[9월 11일]]에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추대]]하면서 새롭게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결성했다.''' 참고로 상하이 임시정부를 제외한 여러 단체들은 물론 실질적으로는 임시정부이긴 했어도 '''임시정부라고 자칭한 적은 없다'''. 임시정부는 정부를 지칭하는 이름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각 단체들은 '''국호인 고려, 신한민국, 조선민국, 한성정부의 대조선공화국 등을 그대로 각각 사용하다가 통합에 따라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으로 통일된 것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provisionalgov3.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13782490720.jpg|width=100%]]}}} || || [[대한민국 연호|대한민국]] 원년(1919년) 10월 11일[br]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br]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br]뒷줄 김철, [[윤현진(독립운동가)|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 [[대한민국 연호|대한민국]] 3년(1921년) 1월 1일[br]임시정부·임시의정원 요인 58명의 신년축하식([[상하이]]) 사진. [br] 1열 3번째가 [[김구]], 2열 6번째가 [[이동휘]], 7번째가 [[이승만]],[br] 2열 11번째가 [[안창호]].[* 제1열 좌로부터 박윤근, 전재순, 김구, 오희원, 미상, 미상, 유기준, 정태희, 김재덕, 김붕준, 엄항섭, 정재형. 제2열 좌로부터 이규홍, 김철, 신익희, 신규식,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손정도, 이동녕, 남형우, 안창호, 오영선, 윤현진, 서병호, 조완구. 제3열 좌로부터 미상, 임병직, 미상, 김복형, 도인권, 최근우, 김인전, 이원익, 정광호, 김태연, 이복현, 미상, 김홍서, 나용균, 황진남, 김정목. 제4열 좌로부터 미상, 왕삼덕, 차균상, 김여제, 안병찬, 장붕, 김석황, 이규서, 김용철, 미상, 송병조, 양헌, 조동호, 이유필.[[http://m.blog.daum.net/sokgiin/7127424|#]]]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